파평윤씨(坡平尹氏)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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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사적지(梅軒事蹟止)
소재지 :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지정번호 : 제229호
지정년월일: 1972년 10월 19일
사적보호면적 : 41,993평
광현당(光顯堂)
광현당은 윤의사가 출생한 집의 당호(堂號)이다. 도중도(島中島)에 있고 건축 연대는 미상이다. 1908년 6월 21일 유시(酉時)에 이 집에서 尹橫公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4세까지 성장했다.
저한당(狙韓堂)
저 한당은 의사가 성장하신 집의 당호이다. 1911년 3월에 광현당으로부터 이 집으로 이사와 1930년 2월 7일 중국으로 망명할 때까지 이 집에서 거하면서 신체와 학문과 사상이 성장하였고, 일제에 항거하는 애국운동을 전개하였다. 현재 이 경내에 의사의 동상과 매헌 기념관이 있다.
부흥원(復興院)
부흥원은 의사가 1928년에 창건하고 이곳에서 민중에게 문맹 퇴치운동과 사상을 함양시키며 신문화 활동을 전개한 전당이다. 부흥원이라 이름한 것은 곧 조국을 광복하는 집이란 뜻으로 의사가 명명하였다. 부흥원은 일제 치하에서 그들의 악랄한 수법으로 파괴되었고 해방 후 아직 제대로 복원되지 못하였다.
충의사(忠義詞)
충의사는 우리 민족사 천추(千秋)에 길이 새겨야 할 숭고한 의사의 애국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의사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1968년 4월 29일 의거 36주년을 맞아 예산군에서 건립하였고, 1978년 4월 20일 충청남도에서 규모를 확대하여 중건하였다.
호남사(湖南祠)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내추리에 있는데 공간공(恭簡公)을 불천지위(不選之位)로 봉안하였고 경내의 영당에는 문숙공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지방문화재 160호(1987)로 지정되었다.
여음진(如飮津)
시조 태사공께서 파주의 사저에서 말을 타시고 임진강을 건너 개경(開京)을 내왕하실 때 항상 강물이 양쪽으로 딱 갈라져 단숨에 강을 건너시었다고 하는데 이를 두고 사람들은 물결 끊고 마시듯 강을 건녔다 하여 이곳을 여음진 이라고 불렀다 하며 여음진이 변해서 임진강이 되었다는 얘기도 전해온다.
정북사(靖北祠)
함경북도 경성읍 승암산 노당 바로 아래에 있는데 사당 내에는 문숙공을 비롯하여 오연총, 김종서, 오박4현(四賢)이 모셔져 있다. 문숙공의 22세손 이신 익헌공(憲柱)이 10살 때인 숙종 시대에 어느날 꿈 속에서 늙은 재상이 나타나서 “나는 문숙공이고 지금 경성 노당(廢堂)에 있는데 비가 오는 날이면 지붕에서 빗물이 새여 괴롭구나. 네가 19세에 급제하여 24세에 함경 감사가 되면 내집을 중수하여 주기 바란다.
”고
부탁하였다. 그 후 공의 춘추 19세에 꿈속에서 한 늙은 재상이 손에 홍패와 어사화를 들고 “헌주야 ! ”하며 크게 세 번을 부르니 곁에 있던 유생들이 그 꽃을 달라고 졸랐으나 노재상은 손을 저으며 “이 꽃은 헌주의 것이니라. ”하시고 익헌공에게 어사화를 주셨다. 노재상이 큰 소리로 시구를 읊기를 “朱崖澹耳는舊作漢家之損 이더니 易水展城이 今非燕王之有”라 하셨다. 꿈을 깨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던 중 과거시험에 나가신 바 시제(詩題)가 “大本朝百官 하여 賀開拓六鎭”이거늘 꿈속에서 듣던 시구를 서두에 쓰시니 장원급제 하셨고
과연 24세때
함경감사가 되셨다. 부임 하신 후 노당을 조사한 즉 과연 비가 새는 지라 공께서 그 산 밑에 사우를 건축하고 ‘명륜각’ 과 ‘동서재’를 건축하여 10주(州) 유생을 모아 학문을 닦게 하시고, 초시를 그 서원에서 보았으나 현판을 ‘양현당(養賢堂)’이라고 하였고 사당은 ‘정북사’라고 사액을 내렸으며 서원은 ‘정북서원’이라고 하였다. 후에 서원철폐령에 따라 헐리었으나 경성군 오촌면 남부동에 살던 희천공(봉록군파)의 헌신적인 노력로 복건하였다.
원수대(元師臺)
함경북도 경성군 오촌면 남부동에 있는데 문숙공 의승전(勝戰)에 세운 비각으로 익헌공(憲柱)이 숙종14년(1718년)에 비문을 썼다. 정북사 동편의 해변가에있다.
장사대(壯士臺)
함경남도 단천읍에서 서쪽으로 4km에 위치해 있는데 문숙공의 승전 공적비이다. 비문은 가선대부 영원군 행직(行直) 공이 썼다.
원수암(元師岩)
두만강변에 있는 큰 바위인데 문숙공께서 여진정벌시 진을 치고 계셨던 곳이라 하여 원수암이라고 부른다.
도린포(都鱗浦)
문숙공께서 여진정벌 하실 때 함산(咸山)에 쳐들어 갔다가 복병을 만나 후퇴할 때 선덕진(宣德鎭) 광포(廣浦)에 이르러 물은 깊고 배도 없어 방황하던 중 어디선가 홀연히 잉어떼가 일렬로 다리를 놓아 잉어의 등을 타고 건너자 사라졌다는 전설에서 도린포라 일컫는다.
시중대(侍中臺)
함경남도 북청(北靑)의 마령(馬嶺 :건자포와 나홍역중간)에 있는데 문숙공께서 여진 정벌시 진을 치고 계셨던 곳으로 ‘시중대’라는 비석과 각(閣)이 있고 위토로 임야 59정보가 있다. 이 위토는 일제시대 임야 조사시 한때 국유지로 편입되었으나 북청 종인들이 북청군 수윤, 상학 종인과 상의하여 선조의 유적지 위토를 국유로 함이 부당하다는 것을 주창하여 도지사와 총독부에 시정 요구하였으나 불허되어 애를
태우던 중 만뢰사(萬賴詞)의 서적 궤짝 속에서 영조(英祖)조에 문숙공 시중대 중수비로 50냥이 하사 되었다는 문적(文籍)이 발견되어 그 문서를 당국에 제출하여 13년 만에 허가를 받아 위토를 되찾았다. 이 위토를 찾는데 북청 종인들이 많은 비용을 부담하였다.
만뢰사(萬賴詞)
함경남도 북청군 양가초리 신북청역 앞에 있는 문숙공의 진영 (眞影)을 모신 사당으로 1898년(광무2)에 건립하였다. 문숙공께서 여진정벌후 회군 하시는 길에 북청 도덕사에 진을 치고 계실 때 그 곳에 있던 화인(畵人)이 공의 영정을 그려 절에 걸었는데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무관심한 승려들과 일반인 들이 보통 불화(弗畵)인 줄 생각 하였다. 그 후 조선시대 억불(抑佛)정책으로 승려들이 헤어질 때 문숙공의 영정을
옮기지 못하고 방치하였을 때 이상한 일이 생겼다. 당시 그 절 밑에 사는 촌로의 꿈속에 문숙공께서 나타나서 말씀 하시기를 “내 영정이 산중 석벽 속에 있는데 비가 내리면 썩게 되니 당신이 찾아다가 그 전대로 달아달라.”하여 꿈속에서 문숙공과 동행하여 그 암벽을 동행한 다음 꿈을 깨었다. 다음 날 노인이 꿈속에서 보았던 대로 그 암벽을 찾아가보니 과연 영정이 있어 예전과 같이 도덕사에 모셨다.그 후 문숙공의 영정 앞에 치성을 드리면 소원을 이룰 뿐만 아니라 영험이 높다는 소문이 드높아 도덕사가 대단히 번창하였다. 1896년 9월에 이원(利原)
현감 윤명오 종인이 관속들이 도덕사에 가서 불공은 드리지 않고 문숙공 영정에 치성을 드린다는 것을 알게 되어 북청부사로 있는 윤자설 종인과 주민 윤승렬 종인이 동행하여 영정을 봉심하고 1897년 10월 18일 문숙공 영정을 도덕사에서 북청시내 종인집에 옮겨 모셨다가 새로 건축한 만뢰사 사당에 모셨다. 사당 앞에는 명륜당(10칸)이 있고 그 앞에 동서재 10칸 문루가 있으며 춘추로 제사를 모시고 있었다.
조양사(朝陽詞)
평안북도 가산군 금학동에 있는데 인근 종인들이 사당을 건립하고 문숙공의 영정을 모시어 향사하고 있다. 1933년에 건립하였다.
수벽사(修闢詞)
전남 함평군 해보면 모평리에 있는 사당으로 1957년에 함평에 사는 여러 종인이 세웠으며 문숙공의 영정을 모시고 향사하고 있다. 임천정사(林泉精舍)라는 강당도 있다.
화남재(花南齋)
1958년 경북 예천군 유천면 화지동에 세운 문숙공을 모신 사당으로 화지문중 종인들이 세웠다.
서강사(瑞岡祠)
광주광역시 남구 방림동에 있는 사당으로 1969년에 인근 종인들이 세웠다. 사당에는 시조 태사공을 비롯하여 문숙공, 문강공, 남원백, 함안백, 문현공 6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육영관(育英館)이 부설되어 있다.
노강서원(老江書院)
1712년(숙종38) 경북 성주에 세운 서원으로 병계공(昇溪公 諱 鳳九)을 배향하고 있다.
몽천서원(蒙泉書院)
경북 울진군 매화리에 있는데 우암공(憂菴公 諱 時衡)을 향사하고 있다.
추모단(追慕壇)
경기도 고양시 벽제읍 관산리에 있는 대언공(代言公 諱 安謫)의 제단 인데 전국 각지의 후손들이 성의를 모아 설단하고 대언공 이하 3위를 모시고 있다.
소부공단(少府公壇)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에 있는 소부공의 제단으로 원래 추원단에 모셨던 비위(碑位)를 옮겨 소부공 이하 실전된 선조들을 모시고 있으며 재실도 신축하였다.
여강재(麗岡齋)
충남 예산군 광시면 시목리에 있으며 태위공(太射公 諱 安庇)이하 4세 5위를 모신 곳으로 1986년 6월에 태위공 후손들이 성의를 모아 재실을 신축하였다. 원래 의정부시 신곡동에 비석과 재실이 있었으나 도시화로 단소로는 적합지 못하다 하여 옮겼다.
용강재(龍岡齋)
전북 남원시 주생면 지당리에 있는데 6세 지후공(抵候公 諱 彦)부터 남원백 • 함안백 까지 모신 단소로서 1960년에 세웠다.
영모단(永慕壇)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법원리(추원단에서 동쪽으로 4km쯤)에 있는 제단으로 판도공(版圖公 諱 承禮)과 공의 둘째 아드님 이신 부윤공(府尹公 諱 普老)공의 아드님 이신 참판공(參判公 諱 須彌)과 파성부원군(坡城府院君 諱 太山), 병판공(兵判公 諱 岑) 및 부마공(駙馬公 諱 巖) 통례공(通禮公 諱 之嶸), 지평공(持平公 諱 世沈)등 8위를 모시고 있다. 1975년에 설단하였다.
의열사(義家祠)
평안남도 중화군 신홍면 용홍리에 있는 사당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평양성을 점거한 왜군과 중화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시다가 용감하게 순국하시어 다같이 호조참판을 추증받으신 4위 (諱 殷衡,殷老,麟,鵬)을 모시고 있다. 또한 중화군 중화면 낙민리 396번지에는 이 네 분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영조 임금때 건립한 의열비(義烈碑)가 있다.
구음재(龜陰齋)
경남 합천군 가회면 함방리에 있는데 선조 8년(1575)에 창건하였으며 참의공(參議公 諱 垠)의 일곱째 아드님이신 사직공(司直公 諱 師騫) 의 4대손 이시며 임진왜란 순절공신 이신 목사공(牧使公 諱 鐸), 목사공의 숙부이신 판서공(判書公 諱 彦禮) 판서공의 아드님이며 의주 호조공신이신 추담공(秋澤公 諱 銑)등 세 분을 모셨다.
시중단(侍中壇)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있는데 문정공(文定公 諱 鱗膽) 이하 12위의 위패를 모셨다. 1982년에 후손 해진(海鎭)과 동찬(東燦)이 700만원을 헌납하여 설단하였다.
성균관은행나무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 대학교 내에 있는 큰 은행나무로 소정공(昭情公)의 현손이신 평와공(平窩公 諱 倬)께서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계실때 성균관 앞 뜰에 은행나무 2그루를 기념 식수하신 것이 지금도 울창하게 자라고 있으며 천연기념물 제59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다.
파평윤씨(坡平尹氏)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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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사적지(梅軒事蹟止)
소재지 :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지정번호 : 제229호
지정년월일: 1972년 10월 19일
사적보호면적 : 41,993평
광현당(光顯堂)
광현당은 윤의사가 출생한 집의 당호(堂號)이다. 도중도(島中島)에 있고 건축 연대는 미상이다. 1908년 6월 21일 유시(酉時)에 이 집에서 尹橫公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4세까지 성장했다.
저한당(狙韓堂)
저 한당은 의사가 성장하신 집의 당호이다. 1911년 3월에 광현당으로부터 이 집으로 이사와 1930년 2월 7일 중국으로 망명할 때까지 이 집에서 거하면서 신체와 학문과 사상이 성장하였고, 일제에 항거하는 애국운동을 전개하였다. 현재 이 경내에 의사의 동상과 매헌 기념관이 있다.
부흥원(復興院)
부흥원은 의사가 1928년에 창건하고 이곳에서 민중에게 문맹 퇴치운동과 사상을 함양시키며 신문화 활동을 전개한 전당이다. 부흥원이라 이름한 것은 곧 조국을 광복하는 집이란 뜻으로 의사가 명명하였다. 부흥원은 일제 치하에서 그들의 악랄한 수법으로 파괴되었고 해방 후 아직 제대로 복원되지 못하였다.
충의사(忠義詞)
충의사는 우리 민족사 천추(千秋)에 길이 새겨야 할 숭고한 의사의 애국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의사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1968년 4월 29일 의거 36주년을 맞아 예산군에서 건립하였고, 1978년 4월 20일 충청남도에서 규모를 확대하여 중건하였다.
호남사(湖南祠)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내추리에 있는데 공간공(恭簡公)을 불천지위(不選之位)로 봉안하였고 경내의 영당에는 문숙공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지방문화재 160호(1987)로 지정되었다.
여음진(如飮津)
시조 태사공께서 파주의 사저에서 말을 타시고 임진강을 건너 개경(開京)을 내왕하실 때 항상 강물이 양쪽으로 딱 갈라져 단숨에 강을 건너시었다고 하는데 이를 두고 사람들은 물결 끊고 마시듯 강을 건녔다 하여 이곳을 여음진 이라고 불렀다 하며 여음진이 변해서 임진강이 되었다는 얘기도 전해온다.
정북사(靖北祠)
함경북도 경성읍 승암산 노당 바로 아래에 있는데 사당 내에는 문숙공을 비롯하여 오연총, 김종서, 오박4현(四賢)이 모셔져 있다. 문숙공의 22세손 이신 익헌공(憲柱)이 10살 때인 숙종 시대에 어느날 꿈 속에서 늙은 재상이 나타나서 “나는 문숙공이고 지금 경성 노당(廢堂)에 있는데 비가 오는 날이면 지붕에서 빗물이 새여 괴롭구나. 네가 19세에 급제하여 24세에 함경 감사가 되면 내집을 중수하여 주기 바란다.
”고
부탁하였다. 그 후 공의 춘추 19세에 꿈속에서 한 늙은 재상이 손에 홍패와 어사화를 들고 “헌주야 ! ”하며 크게 세 번을 부르니 곁에 있던 유생들이 그 꽃을 달라고 졸랐으나 노재상은 손을 저으며 “이 꽃은 헌주의 것이니라. ”하시고 익헌공에게 어사화를 주셨다. 노재상이 큰 소리로 시구를 읊기를 “朱崖澹耳는舊作漢家之損 이더니 易水展城이 今非燕王之有”라 하셨다. 꿈을 깨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던 중 과거시험에 나가신 바 시제(詩題)가 “大本朝百官 하여 賀開拓六鎭”이거늘 꿈속에서 듣던 시구를 서두에 쓰시니 장원급제 하셨고
과연 24세때
함경감사가 되셨다. 부임 하신 후 노당을 조사한 즉 과연 비가 새는 지라 공께서 그 산 밑에 사우를 건축하고 ‘명륜각’ 과 ‘동서재’를 건축하여 10주(州) 유생을 모아 학문을 닦게 하시고, 초시를 그 서원에서 보았으나 현판을 ‘양현당(養賢堂)’이라고 하였고 사당은 ‘정북사’라고 사액을 내렸으며 서원은 ‘정북서원’이라고 하였다. 후에 서원철폐령에 따라 헐리었으나 경성군 오촌면 남부동에 살던 희천공(봉록군파)의 헌신적인 노력로 복건하였다.
원수대(元師臺)
함경북도 경성군 오촌면 남부동에 있는데 문숙공 의승전(勝戰)에 세운 비각으로 익헌공(憲柱)이 숙종14년(1718년)에 비문을 썼다. 정북사 동편의 해변가에있다.
장사대(壯士臺)
함경남도 단천읍에서 서쪽으로 4km에 위치해 있는데 문숙공의 승전 공적비이다. 비문은 가선대부 영원군 행직(行直) 공이 썼다.
원수암(元師岩)
두만강변에 있는 큰 바위인데 문숙공께서 여진정벌시 진을 치고 계셨던 곳이라 하여 원수암이라고 부른다.
도린포(都鱗浦)
문숙공께서 여진정벌 하실 때 함산(咸山)에 쳐들어 갔다가 복병을 만나 후퇴할 때 선덕진(宣德鎭) 광포(廣浦)에 이르러 물은 깊고 배도 없어 방황하던 중 어디선가 홀연히 잉어떼가 일렬로 다리를 놓아 잉어의 등을 타고 건너자 사라졌다는 전설에서 도린포라 일컫는다.
시중대(侍中臺)
함경남도 북청(北靑)의 마령(馬嶺 :건자포와 나홍역중간)에 있는데 문숙공께서 여진 정벌시 진을 치고 계셨던 곳으로 ‘시중대’라는 비석과 각(閣)이 있고 위토로 임야 59정보가 있다. 이 위토는 일제시대 임야 조사시 한때 국유지로 편입되었으나 북청 종인들이 북청군 수윤, 상학 종인과 상의하여 선조의 유적지 위토를 국유로 함이 부당하다는 것을 주창하여 도지사와 총독부에 시정 요구하였으나 불허되어 애를
태우던 중 만뢰사(萬賴詞)의 서적 궤짝 속에서 영조(英祖)조에 문숙공 시중대 중수비로 50냥이 하사 되었다는 문적(文籍)이 발견되어 그 문서를 당국에 제출하여 13년 만에 허가를 받아 위토를 되찾았다. 이 위토를 찾는데 북청 종인들이 많은 비용을 부담하였다.
만뢰사(萬賴詞)
함경남도 북청군 양가초리 신북청역 앞에 있는 문숙공의 진영 (眞影)을 모신 사당으로 1898년(광무2)에 건립하였다. 문숙공께서 여진정벌후 회군 하시는 길에 북청 도덕사에 진을 치고 계실 때 그 곳에 있던 화인(畵人)이 공의 영정을 그려 절에 걸었는데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무관심한 승려들과 일반인 들이 보통 불화(弗畵)인 줄 생각 하였다. 그 후 조선시대 억불(抑佛)정책으로 승려들이 헤어질 때 문숙공의 영정을
옮기지 못하고 방치하였을 때 이상한 일이 생겼다. 당시 그 절 밑에 사는 촌로의 꿈속에 문숙공께서 나타나서 말씀 하시기를 “내 영정이 산중 석벽 속에 있는데 비가 내리면 썩게 되니 당신이 찾아다가 그 전대로 달아달라.”하여 꿈속에서 문숙공과 동행하여 그 암벽을 동행한 다음 꿈을 깨었다. 다음 날 노인이 꿈속에서 보았던 대로 그 암벽을 찾아가보니 과연 영정이 있어 예전과 같이 도덕사에 모셨다.그 후 문숙공의 영정 앞에 치성을 드리면 소원을 이룰 뿐만 아니라 영험이 높다는 소문이 드높아 도덕사가 대단히 번창하였다. 1896년 9월에 이원(利原)
현감 윤명오 종인이 관속들이 도덕사에 가서 불공은 드리지 않고 문숙공 영정에 치성을 드린다는 것을 알게 되어 북청부사로 있는 윤자설 종인과 주민 윤승렬 종인이 동행하여 영정을 봉심하고 1897년 10월 18일 문숙공 영정을 도덕사에서 북청시내 종인집에 옮겨 모셨다가 새로 건축한 만뢰사 사당에 모셨다. 사당 앞에는 명륜당(10칸)이 있고 그 앞에 동서재 10칸 문루가 있으며 춘추로 제사를 모시고 있었다.
조양사(朝陽詞)
평안북도 가산군 금학동에 있는데 인근 종인들이 사당을 건립하고 문숙공의 영정을 모시어 향사하고 있다. 1933년에 건립하였다.
수벽사(修闢詞)
전남 함평군 해보면 모평리에 있는 사당으로 1957년에 함평에 사는 여러 종인이 세웠으며 문숙공의 영정을 모시고 향사하고 있다. 임천정사(林泉精舍)라는 강당도 있다.
화남재(花南齋)
1958년 경북 예천군 유천면 화지동에 세운 문숙공을 모신 사당으로 화지문중 종인들이 세웠다.
서강사(瑞岡祠)
광주광역시 남구 방림동에 있는 사당으로 1969년에 인근 종인들이 세웠다. 사당에는 시조 태사공을 비롯하여 문숙공, 문강공, 남원백, 함안백, 문현공 6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육영관(育英館)이 부설되어 있다.
노강서원(老江書院)
1712년(숙종38) 경북 성주에 세운 서원으로 병계공(昇溪公 諱 鳳九)을 배향하고 있다.
몽천서원(蒙泉書院)
경북 울진군 매화리에 있는데 우암공(憂菴公 諱 時衡)을 향사하고 있다.
추모단(追慕壇)
경기도 고양시 벽제읍 관산리에 있는 대언공(代言公 諱 安謫)의 제단 인데 전국 각지의 후손들이 성의를 모아 설단하고 대언공 이하 3위를 모시고 있다.
소부공단(少府公壇)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에 있는 소부공의 제단으로 원래 추원단에 모셨던 비위(碑位)를 옮겨 소부공 이하 실전된 선조들을 모시고 있으며 재실도 신축하였다.
여강재(麗岡齋)
충남 예산군 광시면 시목리에 있으며 태위공(太射公 諱 安庇)이하 4세 5위를 모신 곳으로 1986년 6월에 태위공 후손들이 성의를 모아 재실을 신축하였다. 원래 의정부시 신곡동에 비석과 재실이 있었으나 도시화로 단소로는 적합지 못하다 하여 옮겼다.
용강재(龍岡齋)
전북 남원시 주생면 지당리에 있는데 6세 지후공(抵候公 諱 彦)부터 남원백 • 함안백 까지 모신 단소로서 1960년에 세웠다.
영모단(永慕壇)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법원리(추원단에서 동쪽으로 4km쯤)에 있는 제단으로 판도공(版圖公 諱 承禮)과 공의 둘째 아드님 이신 부윤공(府尹公 諱 普老)공의 아드님 이신 참판공(參判公 諱 須彌)과 파성부원군(坡城府院君 諱 太山), 병판공(兵判公 諱 岑) 및 부마공(駙馬公 諱 巖) 통례공(通禮公 諱 之嶸), 지평공(持平公 諱 世沈)등 8위를 모시고 있다. 1975년에 설단하였다.
의열사(義家祠)
평안남도 중화군 신홍면 용홍리에 있는 사당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평양성을 점거한 왜군과 중화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시다가 용감하게 순국하시어 다같이 호조참판을 추증받으신 4위 (諱 殷衡,殷老,麟,鵬)을 모시고 있다. 또한 중화군 중화면 낙민리 396번지에는 이 네 분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영조 임금때 건립한 의열비(義烈碑)가 있다.
구음재(龜陰齋)
경남 합천군 가회면 함방리에 있는데 선조 8년(1575)에 창건하였으며 참의공(參議公 諱 垠)의 일곱째 아드님이신 사직공(司直公 諱 師騫) 의 4대손 이시며 임진왜란 순절공신 이신 목사공(牧使公 諱 鐸), 목사공의 숙부이신 판서공(判書公 諱 彦禮) 판서공의 아드님이며 의주 호조공신이신 추담공(秋澤公 諱 銑)등 세 분을 모셨다.
시중단(侍中壇)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있는데 문정공(文定公 諱 鱗膽) 이하 12위의 위패를 모셨다. 1982년에 후손 해진(海鎭)과 동찬(東燦)이 700만원을 헌납하여 설단하였다.
성균관은행나무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 대학교 내에 있는 큰 은행나무로 소정공(昭情公)의 현손이신 평와공(平窩公 諱 倬)께서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계실때 성균관 앞 뜰에 은행나무 2그루를 기념 식수하신 것이 지금도 울창하게 자라고 있으며 천연기념물 제59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다.